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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9경 숲속의 잘 늙은 절 한 채 화암사

불명산 자락에 있는 화암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세월의 흐름을 멋지게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명산의 자연에 숨어있듯 묻혀있기 때문에 사찰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시인 안도현은 "나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 하였다. 국보 제316호로 지정된 극락전이 유명하다

화암사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쫒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쫒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화암사

주운 도토리 몇 알 염주처럼 굴리며 느릿느릿 가는 길 화암사로 안내하는 길은 구두 뒤축만큼 움푹하다. 묵언수행 중인가, 침묵만 우려내고 있는 화암사 늑골, 너무 환해서 숨통이 조여 온다. 사내가 보고 싶은 것은 날갯죽지가 부러진 새의 무덤. 불성(佛性)을 탓하랴 비쩍 마른 견공이 누런 혀로 밥그릇을 핥고 있고 사내의 목덜미에도 경전 몇 구절이 식은땀처럼 흐른다.
날숨과 들숨이 섞인 바람은 세상 끝자락을 몰아 부유하는 목어(木魚)를 거칠게 내리갈기고 생은 포개지도 떼 내지도 못하는 애인처럼 거추장스럽고 탐욕을 버리지 못한 호두알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일몰 직전의 불그스레한 마음이 마당귀를 적시고 허공에 비명을 심어 놓고 비로소 결박을 푸는 사내 화암사는 하루 종일 난해한 불경을 강독하고 있다.
기명숙, <화암사>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 서로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에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안도현, <잘 늙은 절,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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