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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기인(全羅奇人) 이거두리(李普漢)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8
조회수 964

     상관(上關)면 죽림(竹林)리 동네 길가에는 허술한 비석 하나가 서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면(碑面)에는 『이거두리 송덕비』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으나 웬일인지 조국 해방 후에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거두리 비석은 구차한 사람들과 걸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한 푼 두 푼이 모아져서 세워진 것이라는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우리 고장을 흐뭇하게 하는 빛나는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전라기인(全羅奇人) 이거두리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도 연로(年老)한 사람은 이야기 거리로 남아 있으나 잘 모르는 사람은 양광(佯狂)을 부린 사람 정도로 받아 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목천포(木川浦) 당메(唐山) 부자인 경호(敬鎬)의 아들로 김해 김씨(金海 金氏)를 모친으로 1873년 태어났으니 이름을 보한(普漢)이라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입버릇처럼 부르고 다녔던 거두리라는 노래의 후렴과 참봉(參奉)이라는 경칭(敬稱)을 붙여 거두리참봉이라 불렀다. 
거두리란 뜻은 거둬들인다는 말로 잃어버린 나라를 수복(收復)하자는 뜻이려니와 거둬 모인다는 뜻으로 민족이 단합되자는 말이어서 그는 더욱 신나게 불렀던 것이다. 
그는 3.1운동때 서울과 수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구금되었고 거듭 천안에서도 부르다가 옥살이를 했다. 그러한 항일투쟁에서 그는 양광을 부리기 시작하여 일본 경찰로부터 광인으로 지목 되었으니 옷고름을 매지 않고 모자를 구멍 뚫어 거꾸로 쓰고 다녔다. 
마침내 그는 체념된 상황에서 우리 겨레가 남은 것이란 민족 밖에 없다는 신념에서 일생을 사랑에 바친 것이었다. 

청빈한 생활로 지내다가 완산동에서 세상을 뜨니 가난한 사람들과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그의 덕을 추모하던 인파로 상관(上關)골짝을 메우게 되었으며 만사(輓事)의 기폭으로 좁은 목을 물들였다. 상관면 색장리에서 뜨거운 눈물로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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