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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獨立義士) 전태순(全泰順)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8
조회수 1060

                 

전태순(全泰順)은 1885년(고종 22년) 4월 8일 봉동에서 전좌현(全佐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처음의 이름은 태섭(泰燮) 자(字)를 창여(昌汝)라 하였으며 호를 의당(義堂)이라 하였다. 
그의 벼슬은 9품(九品) 종사랑(從仕郞) 임중추원의관(任中樞院議官) 서주임관(敍奏任官) 6등(六等)을 거쳐 창릉(昌陵)의 정자각(丁字閣)을 개수(改修)할 때 그 공사의 감독을 맡아 특별한 공을 세움으로써 정3품(正三品)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이루어지자 그는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봉동으로 돌아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 그 뒤 그는 고향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지도·지휘하던 손병희(孫秉熙)·이인환(李寅煥)·신석구(申錫九)·강덕기(康德基)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활동계획 및 상황을 들었다.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각 고을에 배포할 책임을 부여 받아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배포하고 민중들로 하여금 일제히 봉기(蜂起)할 것을 선동 하였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처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그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일본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하다 불행히 일본 헌병들에게 붙들렸다. 그는 그들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오히려 일본 헌병을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대한의 국민으로서 의리(義理)를 취하려는데 너희들은 나를 강제로 굴복시키려 하느냐, 원흉의 머리를 베어 나라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노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2년의 형(刑)을 언도받아 고양군(高陽郡) 공덕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복역을 마치고 고향 봉동으로 돌아와 봉실산(鳳室山) 속에 머물면서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그 뒤 해방을 맞이하여 남은 여생을 봉동 봉실산 아래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1년 1월 18일에 세상을 하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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