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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소개

유래/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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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면

완주군 3읍 10면의 하나, 본래 전주군 지역으로 소양면이라 하여 대흥, 송광, 백운, 외성,오도, 위봉, 신풍, 신기, 평리, 명덕, 지리, 토정, 삼태, 오상, 일임, 호동, 신단, 잠평, 신교, 원당, 부흥, 율굑, 행단, 갈전, 신봉, 은선, 용암, 대상, 대중, 대하, 복은, 용문, 반곡, 신안, 신원, 삼중, 웅아, 웅삼, 신촌, 월평, 송정, 우정, 죽절, 외주, 내주, 오암, 분토, 신성, 신평, 다리, 상원, 하원, 석성, 왕정, 신왕, 해월, 국촌, 행정, 구진, 화심, 묵방, 유상, 약암, 마수, 용연, 봉암, 회룡, 망표, 황운의 59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우정리는 진안군 부귀면에 넘겨주고, 대흥, 명덕, 신교, 신원, 신촌, 죽절, 해월, 회심, 황운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동상면과 진안군 부귀면, 서쪽은 용진읍과 전주시, 남쪽은 상관면과 진안군 성수면, 북쪽은 고산면과 동상면에 닿음.

신교리(新橋里)

본래 전주군(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다라 신교리 신단리 잠평리 원당리 부흥리 율곡리 행단리 갈전리 신봉리 은선리 응암리를 병합하여 신교리라 하여 소양면에 편입함.
잠평(潛坪)

부분명-가자골, 삼거리(三距里. 수통목. 웃삼거리) 잠평리는 들에 위치하여 전에는 홍수 물에 잠겼으므로 그런 들이라는 뜻으로 잠평리라 했다고 한다. 가자골은 잠평리 남쪽에 있는 마을. 삼거리는 앞에 세가랫길이 있어 붙여진 이름, 수통목이라는 이름은 물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원신교(元新橋. 새다리)

부분명-부흥리, 원당리 원신교는 본시 신교리의 이명을 취한 중심 마을로 법정 이명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元)’을 덧붙인 것. 부흥리는 자연명이 아니라 명명된 이름이다. ‘숲모롱이’는 숲의 모롱이에 위치했기에 붙은 명칭. 부흥리에는 5세대가 살고 있다. 원당리에는 전에 원당(願當)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였었는데 당집 신의 도움으로 왜군이 크게 패했다고 한다. 지금 15세대가 살고 있다.

율곡(栗谷里)

부분명-갈전리(葛田里), 신기(新基. 새터) 율곡은 뒷산 골짜기에 밤나무가 울창해서 생긴 이름이고, 갈전리는 뒷산에 칡이 많아 ‘칡밭→갈전’이라 한다. 신기는 새터가 본 이름으로 율곡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

행단(杏丹里. 杏檀里)

큰 살구나무가 있어 공자의 행단강학을 상상하고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응암(鷹岩. 매골. 應岩)

부분명-신봉리, 은선리(隱仙里. 절골) 응암은 매봉산 위에 매와 비슷한 형상의 바위가 있어 그것을 매바우라 하는데 그 밑의 마을. 신봉리는 갈전리 남쪽에 있는 마을. 신봉리는 갈전리 남쪽에 있는 마을. 은선리에는 전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이름이 은선암이었다고 한다.

명덕리(明德里)

본래 전주군(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명덕리 신기리 평리 지리 토성리 삼태리 오상리 일임리 호동을 병합하고 중심 마을의 이름을 취하여 명덕리라 함.
마월(馬月里)

‘마’의 고어 ‘ ’은 ‘위. 머리.크다’등의 말이고, ‘월(月)’의 고어는 ‘다리’인데 ‘다리’가 달 외에도 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 다리’는 윗들, 버릿들, 큰들 등의 뜻에서 이루어진 명칭이 아닐까 한다.

평리(坪里)

부분명-산수동, 신덕리 평리는 들마을의 뜻이라 산수동은 ‘산소골’즉 묘가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덕’의 ‘덕’은 터 또는 언덕이라는 말이니 신덕은 곧 새터라는 말이다. ‘새터’라는 이름은 그 마을 이 이루어질 때 근처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그 마을이 이루어진지가 수백년 되었다 한들 당시에는 새터다. 특히 터를 ‘덕’이라 하던 때는 조선조 이전이다. 지금은 신덕에 인가가 없다.

원명덕(元明德)

원명덕의 ‘원(元)’은 법정 이명과 구분하기 위하여 ‘명덕’에 덧붙인 것이다.

토정(土亭里)

부분명-화산리(花山里. 까끈절) 토정리는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 화산리는 산수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싸리 꽃이 만발하여 꽃산 이라 불렀다 한다.

삼태(三台里)

부분명-오상리(五相里) 삼태는 토정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삼태기 같다는 설도 있고 풍수설에 삼태오상의 명당이 있다 고도 한다. 오상의 뒷산에 다섯 정승이 날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다.

일임리(日任里)

부분명-호동(虎洞) 일임은 일제 시대 일본인이 많아 살아 ‘일인거리’라고 하던 것이 ‘일인→일임’이 되었다고 한다. 호동은 풍수설에 맹호출림형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죽절리(竹節里)

본래 전주군(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죽절리 외주리 내주리 오암리 분토리 신성리 신평리 황운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 내 중심 마을의 이름을 취하여 죽림리라 했다.
원죽절(元竹節)

부분명-신기촌(新基村. 새터) 원죽절은 본 이름 죽절리에 ‘원(元)’을 붙여 법정 이와 구분한 것. 죽절리에는 대밭이 많았다고 하니 ‘죽전→죽절’인 듯. 신기촌은 죽절 남쪽에 새로 이루어진 마을.

분토(分土洞. 粉土洞)

‘분토’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분토(흰 흙)가 나서 생긴 이름.

내주(內周里. 안엔데기. 인덕리. 내바지)

부분명-외주리, 오암리 내주 외주는 안엔데기 밖엔데기의 한자 표기고 ‘언데기’는 ‘언덕’이며, ‘인덕리’의 ‘덕’도 ‘언덕’의 고어다. 오암리에는 자라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생긴 이름.

황운리(黃雲里)

본래 전주군 (1935년 10월 이후는 완주군)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황운리 마수리 용연리 회룡리 망표리를 병합하여 그중 황운리의 이름을 취하여 리명을 삼았다.
원황운(元黃雲)

리명을 취한 으뜸 마을.

회룡(回龍里)

풍수설에 뒷산의 산세가 용이 감아 둘러 있는 것처럼 생긴 회룡고조혈이라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상망표(上望表. 웃것보래)

본 이름 것보래를 상 하로 구분한 명칭. 것보래는 근처에 먼저 있었던 마을에서 곁에 바라보이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부르던 이름일 것이다.

하망표(下望表. 아랫것보래)

‘상망표’ 참조.

용연(龍淵里)

부분명-봉암리(鳳岩里. 송광나드리) 용연은 앞 내에 용못이 있어 일컫던 명칭이고, 봉암리는 회룡리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또 송광나드리라 하는 것은 송광사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마수(馬水里)

공수설에 갈마음수혈이 있다고 하여 일컫던 명칭.

대흥리(大興里)

본래 전주군(1935년 10월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흥리 송광리 백운리 의성리 오도리 위봉리 신풍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흥리라 함.
봉덕(鳳德. 새터. 新基)

‘봉덕’이 곧 ‘새터’다. ‘봉(鳳)’을 ‘새봉’이라 새김하므로서 ‘봉(鳳)’은 ‘새’의 새김이고 ‘터’의 고어는 ‘덕’이니 ‘새터’가 곧 ‘봉덕’이다. ‘터’를 ‘덕’이라고 할 시대라면 봉덕은 조선조 이전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원대흥(元大興)

‘대흥’은 대중 사이에서 이루어진 자연명이 아니라 명명된 이름이다.

송광 1리(松廣一里)

부분명-백운리(白雲里) 송광은 뒤에 송광사가 있어 이루어진 이름이고 마을이 커지자 1, 2리로 나누었다.

송광 2리

‘송광 1리’ 참조.

오성(五城)

부분명-오도리(五道里. 五道峙), 외성리(外城里) 오성은 오도리와 외성에서 한자씩 취한 분리명. 오도리는 오도리에서 고산면 남봉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오도치다. 외성리는 위봉산에 있는 위봉산성의 바깥쪽이므로 일컫는 이름.

위봉리(威鳳里)

뒤쪽에 위봉사가 있어 지어진 이름. 이 밖에 대흥리에는 여러 고적지가 있다. 위봉산 중턱에 위봉산성이 있고, 위봉산성안에 행궁(行宮) 터가 있는데 행궁은 임진왜란 때 전주성이 위급하자 경기전(慶基殿)의 영정을 옮겨 모신 곳이다. 절로는 송광사, 쌍계사(雙溪寺), 태조암(太祖岩), 송광사 남쪽에 있던 남암(南岩)의 은선암(隱仙岩)의 터, 위봉산 성 바깥쪽에 있던 외성창(外成倉)의 창고 터, 위봉산성 안에 있던 내성창(內成倉)의 창고 터, 위봉산성의 서문 등 허다하다.

해월리(海月里)

본래 전주군(1935. 10월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해월리 다리리 상원리 하원리 석성리 왕정리 신왕리 국촌리 행정리 신풍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월리라 함.
다리(多里. 다리목)

부분명- 천덕암(天德岩) 다리는 전에 ‘청실’이라는 배를 진상했기에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 천덕암은 절 천덕암이 있는 옆이다.

원암리(元岩里)

부분명-독지(讀紙), 석성리(石城里), 하원암리(下元岩里) 원암리는 바위가 많은 곳이니 그런 뜻에서 이루어진 이름이겠고, 독지는 석성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 석성리는 다리 동쪽에 있는 마을. 하원암은 원암리 아래쪽 마을.

신왕 1리(新 一里)

부분명-왕정리(王亭里), 덤풀주막 신왕은 왕정리가 생긴 뒤에 새로 생겨 붙여진 이름인데 신왕을 다시 1리 2리로 나누었다. 왕정리는 전 설에 조선 태종이 대흥리에 사는 최양(崔瀁)을 예로써 맞이하고자 가다가 머물러 쉰 곳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태종이 진안 마이산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하여 가다가 이곳에 머물러 ‘왕정’이란 이름이 생 겼다고도 한다. 덤풀주막은 덤풀이 많았던 곳의 주막.

신왕 2리

부분명-국촌리(菊村里) ‘신왕 1리’ 참조, 국촌리는 신왕 동북쪽에 있는 마을.

해월(海月)

‘해(海)’의 고어는 ‘바라 바랄’로 넓다는 뜻으로도 쓰였고, ‘월(月)’의 고어는 ‘다리’로 들이라 는 말이기도 하니 ‘바라다리’는 넓은 들, 큰들이라는 말이라고 보아진다.

화심리(花心里)

본래 전주군 (1935. 10월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화심리 구진리 묵방리 유상리 약암리를 병합하여 화심리라 함.
구진(九津. 龜津. 九進)

부분명-신기(新基. 새터) 신기는 구진리 동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

원화심(元花心)

부분명-묵방리(墨房里. 먹방이) 원화심은 법정 이명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元)’을 덧붙인 것. 화심은 그곳이 풍수설에 작약화예혈이 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묵방리는 ‘먹방’이 본 이름인데 그 마을이 묵방산 밑이므로 산 이름에 서 마을 이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고, 또 마을에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어 마을 이름이 먼저 생 기고 그에 따라 산 이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고대에는 평야 지대가 아니면 곳곳에 먹을 만드 는 먹방이 있었다. 그런데 송연묵(松燃墨)을 만드는 곳은 산 기슭이나 산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산 이름 먹방산이 먼저 생길 수도 있다.

유상(柳上里)

뒷산에 유지앵소혈이 있다는 풍수설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약암리(藥岩里. 약바우)

부분명-성주동(聖周洞. 聖株洞. 聖智洞) 약암리는 바위 사이에서 작약꽃이 피었다고 하며 그래서 작약동이라고도 한다. 성주동에는 성인야유혈 이 있다고 한다. 화심리에는 이 밖에 먹방이산 제당, 장승배기, 오씨효자문 등이 있다.

신원리(新元里)

본래 전주군(1935. 10월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원리 대상리 대중리 대하리 북은리 용문리 반곡리 신안리를 병합하여 신원리라 함.
대승(大勝里. 大中里)

부분명-원앙리(원앙골) 대승리는 뒷산에 노승출동혈이 있어 대승(大僧)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원앙골은 대승리 서쪽에 있는 마을.

하리(下里. 大下里)

부분명-신곡리(新谷里) 하리는 대승리 서남쪽 아래에 있으므로 하리라 하였고, 신곡리는 하리 북쪽에 있는 마을.

상리(上里. 大上里)

부분명-보검리(寶劍里) 상리는 대승리 위쪽에 있어 생긴 이름.

원신원(元新元. 新院)

부분명-신안리(新安里) 신원은 조선조 때 ‘신원’이라는 원집이 있어 생긴 이름. 신안리는 신원 서북쪽에 있는 마을.

반곡(盤谷里)

부분명-용문리(龍門里. 용문안) 반곡리는 지형이 소반처럼 생긴 옥녀봉반형이라 한다. 용문리는 반곡리 동쪽에 있던 마을로 6.25동란때 없어지고 지금은 용문사 뿐이다.

신촌리(新村里)

본래 전주군(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삼중리 웅하리 원평리 웅상리 송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촌리라 함.
삼중(三中里)

부분명-송정리(松亭里), 새터(新基) 삼중리는 신월리 송정리 두목리로 가는 길 세 갈래길의 중간에 있어 이루어진 명칭. 송정리는 상중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 정자가 있어 이루어진 이름.

신촌(新村. 새터)

부분명-두목리 신촌은 당시에는 근처에 생긴 마을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었겠으나 1914년 경에는 신촌리의 으뜸 마을이 었다. 두목리는 신촌 북쪽에 있는 마을로 그 곳에 아가위나무가 많아서 일컬은 이름이라 한다.

월상(月上)

부분명-상리(上里. 능리. 곰리. 능상리), 하리(下里. 능하리), 월평리(月坪里) 월상은 월평과 상리에서 한 자씩 취한 분리명이고, 곰티는 곰재라는 말로 ‘곰’은 뒤라는 말이니 ‘뒷 재’라는 뜻인데 그 웅리는 다시 상 하로 구분하여 웅상 웅하로 일컬었다. 월평은 신평 동쪽에 있는 마 을로 지형이 반달 같아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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