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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전설
100%
화산면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운서상면의 상호, 하호, 누항, 밀파, 검단, 병암, 우월, 죽동, 봉황, 동봉, 용복, 가정, 공수, 정자, 대정, 신내, 북장, 신풍, 창곡의 19개 동리를 병합하여 화개산의 이름을 따서 화산면이라 하여 운산, 우월, 화월, 운곡, 춘산, 화평, 운제의 7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35년 삼기면의 종리, 와룡의 2개 리와 운선면의 승치, 성북의 2개 리를 편입하여 11개 리가 되었다. 동쪽은 운주면, 남쪽은 고산면, 서쪽은 비봉면과 익산군 여산면, 북쪽은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가야곡면, 양촌면에 닿음.
화평리(花平里)
상고성(上古城)
마을 뒤 고 성산에 옛 성터가 있어 고성이라 했고, 고성을 위치에 따라 상하로 나눔
대평(大坪)
부분명-성남(城南) 성남은 고성산의 남쪽임.
하고성(下古城)
상고성의 아랫마을.
수학(水落)
부분명-후곡(後谷. 뒷골. 後古里) 수락은 화평천 물이 떨어지는 곳, 화산 일대의 물이 모두 이 마을 앞 내에 모여든다. 후곡은 수락뒤의 마을이므로 뒷골.
화월리(花月里)
가정(柯亭子. 개정자)
부분명-북장리(北長里. 너더리), 술독바우 가정은 앞에 가나무 정자가 있어 생긴 이름. 따라서 이 마을 앞들을 정자 안들이라 한다. 북장리는 운제 현의 북쪽이고, 전에 장이 섰다. 술독 바우에서는 숫돌이 났다.
신공(新公)
부분명-신화평(新花坪. 사작거리), 공수평(公須坪. 공수골) 신공은 신화평과 공수평에서 한 자씩 취한 분리명. 사작거리에는 운제현의 사직단이 있었다. 공수골에는 전에 도편수인 공수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정자(亭子洞)
부분명-구룡항(九龍項. 구렁목), 정동(井洞. 시암골) 정자동에는 정자나무가 있었고, 구룡항은 지형이 구렁목이다. 정동에는 물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
대서(大書)
부분명- 대정, 서당동, 신우곡대서는 대정과 서당동에서 한자씩 취한 분리명, 대정에는 큰 우물이 있었고 물이 차서 ‘한천’. 신우곡은 서당골 서쪽에 있는 마을.
창곡(倉谷)
부분명-불당골(佛當) 창곡에는 전에 사창이 있었다고 한다. 불당골에는 절터가 있다.
구라(九羅. 구레실. 九羅谷)
부분명-아랫구레실. 웃구레실 1987년 비봉면 수선리에서 화산면 화월리로 편입되었다. 골짜기를 고라댕이 또는 고라실이라 하는데 구라도 ‘고라실→구레실’로 봄.
춘산리(春山里)
예곡(禮谷. 여수개)
뒷산을 예봉산(禮峰山)이라 하고, 그에 여수 고개(여우고개)가 있는데 그 밑의 마을임.
덕동(德洞)
부분명-작동(鵲洞. 깐치울), 아래뜸 덕골의 덕은 터 또는 언덕의 옛말이다. 깐치울에는 까치가 많이 서식했다. 아래뜸은 덕동 동남쪽 아래에 있다.
운곡리(雲谷里)
봉판(鳳板)
부분명-봉산(鳳山), 판교(板橋. 판거리. 너더리) 봉판은 봉산과 판교에서 한자씩 취한 분리명, 봉산은 뒷산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되고, 판거리는 예전에 장이 섰기에 생긴 이름. 판은 장판, 너더리는 넓은 들, 또는 너덜겅.
돈의(頓義. 돈용골)
부분명-학봉(鶴峰. 솟대배기) 돈의를 돈용골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에 전에 돈용이라는 호를 가진 김씨가 살아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학봉을 또 솟대배기라고도 하는데 전에 솟대가 박혀있었다.
수실(壽室. 壽谷, 水谷, 숯실)
전에 숯을 구어 숯실이라 한다.
부현(釜峴. 가마재)
마을 뒤에 있는 재 이름이 가마재다. 그 형국이 가마솥과 같다 한다.
석천(石泉里. 이방골)
부분명-말목, 선대, 작은선대울 석천리에는 돌 사이에서 나오는 샘이 있고 이방(吏房)이 살아서 이방골이라고도 한다. 말목은 뒷산이 말처럼 생겼는데 그 목이 되는 곳. 선대에는 풍수설에 선인반대혈이 있다 하고, 학정리는 뒷산의 학의 목처럼 생겼다 한다.
우월리(牛月里)
용봉(龍鳳)
부분명-용복리(龍伏里), 봉황리(鳳凰里), 동봉리(東鳳里) 용봉은 용복과 봉화에서 한자씩 취한 분리명, 용복리는 뒷산이 용이 엎드린 것처럼 생겼다 한다. 봉황리는 뒷산이 봉황산인데 봉황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또 뒷산에 부엉이가 많이 살았다고도 한다. 예전에 부엉이를 봉으로 표기한 곳이 많았다. 동봉리는 봉황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봉리다.
죽병(竹屛)
부분명-죽동(竹洞), 병암(屛岩. 밝검단이) 죽병은 죽동과 병암에서 한 자씩 취한 분리명. 죽동은 대숲이 무성해서 일컫던 이름이라고도 하고, 지형의 소의 죽통과 같아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병암에는 병풍처럼 생긴 병풍바위가 있다. 밝검단이는 운산리 안검단이 바깥쪽이 된다.
원우월(元牛月. 소두러니. 소두렝이)
소두렝이는 소가 드러누은 와우혈(瓦牛穴)이라고 한다.
운산리(雲山里)
밀파(密坡. 밀파실. 密坡谷. 玉蓮洞)
부분명-검단이(檢谷) 밀파실을 또 옥련동이라 하는 것은 북쪽에 옥련암이란 암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하(漏下)
부분명-누항(漏項. 시어목. 시우목). 하호(下虎. 고산거리). 중리(中里) 누하는 누항과 하호에서 한 자씩 취한 분리명. 시어목은 누항의 본 이름으로 이 마을 물이 천호동굴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목(좁은 통)이라는 뜻. 하호는 호두 아래쪽 마을. 중리는 가운데 마을.
금평(琴坪. 錦坪)
부분명-장재(張財. 長財. 장재울) 금평은 뒷산에 옥녀직금혈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장재에는 옛날 장자(甲富)가 살았다고 한다.
상호(上虎)
부분명-호두(虎頭. 범머리). 돔박골 상호는 범머리를 위치에 따라 상하로 구분한 명칭. 범머리는 뒷산이 범의 형국이라 한다. 돔박골은 범머 리 북쪽에 있는 마을.
와룡리(臥龍里)
나복(蘿伏洞. 蘿福洞. 蘿복. 蘿 洞)
풍수설에 나복혈이 있다든가 영라하산혈이 있다고 한다.
임전(林田. 임전말)
부분명- 새터 임전은 전에 밤나무 숲속에 쌓여 있던 밭이 마을이 되어 ‘숱받→임전’이다. 새터는 즘터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
상와(上臥龍. 중뜸)
점터(즘터) 와룡은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한다. 상와 중와 하와 등은 와룡을 위치에 따라 일컫는 명칭. 점터에는 전에 옹기점이 있었다.
가양(佳陽. 可陽. 갱이)
부분명-후동(後洞. 뒷골). 하와(下臥龍) 가양은 마을 뒤에 온양(溫陽) 가양(佳陽) 춘양(春陽)의 삼양명당이 있다고 한다. 후동은 하와 서북쪽에 있는 마을.
종리(宗里)
원종(元宗里. 마루들)
부분명-시향골(시암골. 가향. 향교골, 界谷). 구두곡 종리는 높은 들의 위쪽에 위치하여 ‘머리들’의 옛말 ‘마리들’의 한자 표기다. 시향골에는 운제현의 향교가 있어 향교골, 샘이 있어 시암골, 시향골은 시향(時享. 時祭)을 지내던 곳인지? 구두곡은 성가 마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북쪽산이 거북의 머리 형국이라 한다.
궁평(弓坪. 宮坪. 궁들)
부분명-구압들. 궁평은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함.
번대(蕃垈. 번디)
부분명-성부동(城釜洞. 釜洞. 성가마골) 번대에는 풍취라대의 명당이 있다 한다. 성가마골에는 가마솥처럼 생긴 산이 있다.
농하(農下)
부분명-농소, 상용수, 하용수 용수말을 위치에 따라 구분한 이름들이다. 농소말에는 전에 농소가 있었다고 한다.
용동(龍東)
부분명-세동(細洞. 가는골. 사농골) 세동은 골짜기가 좁고 가늘다.
마안(馬鞍. 길마재)
마안은 길마재의 한자 표기다. 뒷산이 주마탈안형이라고도 한다.
승치리(升峙里)
미남(彌南里)
부분명-미동(彌洞. 동편이) 뒤산을 미륵산이라 하는데 미남은 미륵산의 남쪽이고 미동은 미남리 동쪽에 있다. ‘동편’이란 이름도 미남리 동편이란 말이다.
미서(彌西. 쇠편이)
미남 서쪽 마을. 쇠편이는 먹방이에 대장간이 있었으니 그와 관계된 이름이리라 한다. 그렇다면 ‘쇠평이→쇠평이’로 보아야겠다.
원승(元升峙. 되재)
부분명-먹뱅이(?房. 되재먹뱅이. 승치리먹뱅이), 쇠못골 원승치는 법정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본 승치리라는 뜻에서 ‘원(元)’을 덧붙인 것. 승치의 본 이름 되재는 고개가 매우 되므로 또는 지형이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아 생긴 이름이라 한다. 먹방이에는 예전 도처에 많았던 먹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쇠못골은 되재 서쪽에 있는 마을.
성북리(城北里)
거사(居士里. 巨梭里)
부분명-백암리(白岩里) 거사에는 선비가 많이 살아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하고, 백암리에는 앞에 흰 바위가 있다.
남동(南洞. 쪽골. 조화골)
부분명-석교리. 왜말. 황골. 작은 황골. 큰 황골쪽골에는 전에 쪽을 많이 재배했을 것이다. 석교리에는 전에 돌다리가 있었다. 왜말에서는 전에 기와를 구어 ‘와말→왜말’이다. 황골은 쪽골 동쪽에 있는 마을.
운제리(雲梯里)
옥포(玉浦)
부분명-멱어리골. 조선조 때 옥포역이 있었다. 옥포는 경천저수지 가에 있는데 앞이 포구처럼 생겼다고 함. 먹어리골은 운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머거리골과 작은 머거리골로 나뉨.